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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쿠농

빙녹 / 모님이 주신 '카페' 주제로 연성했던거






순전히 우연이었다. 길을 가다 잠깐 커피나 마실까 하고 들렀던 카페에서 고등학교 시절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다른 학교의 농구부원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히무로는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대로 멈추어섰다. 어서오십시오. 낮은 목소리가 딱딱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제서야 히무로는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을 뻔 했다. 미…도리마군? 하고.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으려던 것 보다 카운터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내질러지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정말로 내뱉었을 것이었다.


어라, 요센의 히무로씨 아니세요?


오랜만이네요! 커피를 내리던 와중에 제가 들어오는 것을 본것인지 타카오의 손에는 커피잔이 두개 들려있었다. 신쨩! 여기, 3번 테이블 아메리카노 두 잔! 미도리마가 타카오의 손에서 커피 두 잔을 받아갔다. 멀어지는 미도리마의 모습에 잠깐 눈길을 주었던 히무로는 타카오의 목소리에 다시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 참. 혹시 저 기억하세요? 슈토쿠의 포인트 가드였던, 혹여나 기억 못할까봐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진 타카오의 물음에 히무로가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해. 타카오군이지? 히무로의 물음에 타카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몇 년 만이죠? 이, 삼년 만인가? 아,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저희 공식전에서 한번도 붙은적 없죠? 한번쯤은 요센이랑도 경기해보고 싶었는데… 너무 멀어서 친선경기하기도 그랬고.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보는지 그리운 표정으로 턱을 괸 타카오가 말끝을 흐리다가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 그때가 참 좋았는데. 빛나는 청춘. 캬!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밝게 띄우려는 듯 타카오가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 너머로 머리 하나쯤은 커보이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떠들지 말고 네 할일을 하라는 것이다, 타카오.
억, 신쨩. 손님도 얼마 없는데 쉬어도 되지않아? 그보다 점장한테 핀잔주는 아르바이트 생이라니.
네가 쉬는 것은 상관없지만 네가 쓸데없이 떠드는 덕분에 히무로씨가 계속 서있다는 것이다.
어이쿠, 내 정신좀 봐. 죄송해요, 히무로씨. 제가 너무 붙잡았네. 신쨩! 창가자리로 히무로씨 안내 좀 해드려.


괜찮다고 사양하기도 전에 미도리마가 몸을 돌려 안내하려는 듯 앞으로 나아갔기에, 히무로는 어쩔수 없이 미도리마의 뒤를 따라갔다. 곧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히무로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의외였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공식전에서 만난적이 없었기에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 미도리마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은… 묘했다. 가슴 속에 불덩이가 들어차 뜨겁게 일렁였다.

따스한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히무로는 미도리마가 건네주는 메뉴판을 받았다. 보통 카페와 별다를 것 없는 메뉴들의 마지막에, 보통 카페와는 색다른 메뉴가 쓰여져있었다. 오늘의 별자리별 행운의 메뉴.


이건…?
행운을 보충하기 위한 별자리별 메뉴라는 것이다.
하하… 재밌네. 이걸로 하나 부탁할게. 별자리는 전갈자리야.
…잠시만 기다리라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메모지에 전갈자리라고 메모한 미도리마는 메뉴판을 돌려받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얼핏 바라본 손가락에는 더이상 테이핑이 되어있지 않았다. 단정한 손톱이 그대로 드러난 손가락을 바라보며 히무로는 한순간 울컥 치밀어 오른 무언가를 느꼈다. 더이상 농구 하지 않는구나.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사실 하나에 제 속에 들어찬 불덩이가 한순간 치솟아 올랐다. 자신앞에 컵을 내려놓는 매끄러운 손을 뚫어지듯 바라보던 히무로가 타오르는 속을 억누르며 겨우 웃어보였다. 새카만 에스프레소의 수면에 일그러진 미소가 비쳤다.

더이상 농구를 하지 않는다. 기적의 세대, 그 시대 모든 슈팅가드들 중 최고였던 그 미도리마 신타로가 더이상 농구를 하지 않는다. 배신감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자신이 넘으려고 몇번이고 몸부림쳤던 그 벽 너머에서 찬란히 빛나던 미도리마 신타로가. 모든 슈팅가드들이 부러워 마지 않았던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신이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그 재능을 가진 천재 슈터 미도리마 신타로가.

목 너머로 넘어가는 에스프레소가 독이라도 되는 것 마냥 썼다.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은 그저 잘 되어봐야 범재 수준의 재능이라는 것을. 천재들의 선을 넘어보려 발버둥치며 노력했지만 어떻게 노력해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매번 벽에 부딪히고 좌절하면서도 히무로는 노력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노력하는 것 마저 포기한다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미도리마 신타로의 경기를 보러 간것은 그저 충동이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아츠시. 아츠시만큼의 재능을 가졌다고 하는 기적의 슈터. 그 재능이 어느정도의 재능인지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 관중석에 앉았다. 경기를 보기 전까지 내심 별다를 것이 없기만을 바랬다. 실은 저에게 주어지지 않은 재능이 남에게 있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매끈한 손끝에서 쏘여져 나가던 농구공이 그리던 궤적을 기억한다. 높이 골대를 향해 쏘아진 공이 천천히 코트위를 지나가며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것이 먼 관중석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한치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공을 보며 히무로는 숨을 멈췄다. 커다란 손이 내장을 힘껏 쥐어짜는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속이 뒤틀렸다. 숨을 쉴때 마다 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운 숨이 토해져나왔다.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천재가 코트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절망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천재가 증오스러워 미칠만큼 그만큼 천재에게 끌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보며 절망하는 동시에 그 놀라운 재능을 보며 환희에 젖는 자신이 있었다.


뭐든지 주문할 수 있다면.

이런 한 잔의 에스프레소 따위가 아니라, 저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을 재능을 한 잔 주문할 수 있다면.
그 것이 얼마나 쓰더라도 기쁘게 마실 수 있을텐데.


히무로는 남은 에스프레소를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꺼번에 들이킨 에스프레소가 썼다. 속이 엉망이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삼킨듯 홧홧했다. 맨 처음으로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을 때 처럼, 맨 처음으로 저에게 없는 재능으로 빛나던 천재를 발견했을 때 처럼 그 때 처럼 숨이 가빠왔다. 저에게 없는 재능을 가져 간 주제에 그것을 내려놓은 미도리마가 미웠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슛을 쏘던, 저 매끈하게 뻗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버리고 죄다 씹어 삼키고 싶었다.

벌써 가시게요? 하고 묻는 타카오에게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웃어준 히무로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가십시오. 뒤를 바짝 쫓아오는 낮은 목소리에게서 벗어나려는 듯이 히무로가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다.

툭.
툭.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음에 절망이 하나둘 길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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