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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쿠농

흑녹 / 진단메이커 1

새연성이 하고 싶어서, 메모해뒀던 진단메이커 설정으로 : 흑녹, '다음에 또 만나' 키워드는 질식. 





 …그렇습니까. 쿠로코는 담담하게 방바닥에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몸에 도는 약 기운에 눈을 가늘게 뜬 남자가 흐려지는 시선을 필사적으로 맞춰왔다. 입술이 열리고 단어가 되지 못한 목소리가 의미 없이 방안을 맴돌았다. 마치 아이의 옹알이와도 같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쿠로코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미도리마군이 마신 단팥죽에 약을 좀. 남자의 눈에 씌워진 안경을 벗겨내자 반쯤 풀린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남자의 맑은 눈동자는 줄곧 쿠로코가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었다. 남자가 곧은 의지를 담은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쳐올 때마다 쿠로코는 제 안에서 뭔가가 울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도리마군은 낯선 사람에게는 가시를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주제에, 한번 마음을 준 상대에게는 아무런 경각심도 가지지 않는 나쁜 버릇을 갖고 있어요. 물론,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만.


평상시의 남자와는 달리 흐리멍덩해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쿠로코는 귀를 기울였다.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낮게 깔려 쉼 없이 웅얼댄다. 목소리가 귀를 간질일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네. 계속 좋아했습니다. 물론 미도리마군이 알아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미도리마군은 둔하고 … 어떤 면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미도리마군이 지금껏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걸 몰랐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습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조심스레 단추를 두어 개 풀러 내리고, 쿠로코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움찔, 하고 남자의 움직임이 그대로 몸을 타고 전해졌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여전히 문장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덧없이 흘러내렸다. 쿠로코는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주워 소중하게 끼워 맞췄다. 아니요. 이건 미도리마군이 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미도리마군이 제 마음을 알아주었다면 … 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미도리마군이 제 마음을 몰라줬던 게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쿠로코는 초점을 잃은 남자의 시선과 시선을 맞추며 새하얀 목 위로 손을 겹쳐 올렸다. 고동치는 생명이 한 겹의 피부와 한 겹의 얇은 라텍스를 사이에 두고 흐르고 있었다. 천천히 손에 힘을 주며 쿠로코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미도리마군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도리마군이 혼자 있던 그 공간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였지, 그 곳에 누가 들어온다면 말이 또 달라지죠. 아무도 안 들이는 것은 괜찮아요. 그 누구의 것도 되어주지 않는다면 제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미도리마군, 이번에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잖습니까. 손 아래서 사랑이 마구 날뛰었다. 미도리마군이 남의 것이 되는 건 싫어요.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뚱이를 억지로 억누르고 쿠로코는 상냥히 달랬다. 쉬이, 괜찮아요. 금방 끝날거예요.  






매끄럽게 뻗은 남자의 손에서 반지가 빛났다. 남자가 굳어버리기 전에 쿠로코는 남자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제 손가락에 그 반지를 껴보았다. 남자의 손가락에 맞춘 반지는 쿠로코에게는 조금 컸지만, 그렇다고 끼고 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짝거리는 금속의 매끄러운 표면에 입을 맞추며 쿠로코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만나요. 미도리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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