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챌피는 눈 앞의 남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남자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술잔을 기울였지만, 자신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걸 마틴은 알 수 있었다. 눈 앞의 남자. 그랑플람 재단의 젊은 인재. 티엔 정은 이번에 마틴이 받은 의뢰대상이었다. 저물어가는 재단이 다시 재기의 기회를 얻은건 이 남자의 덕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의 능력자. 전장에서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그가 스카웃하는 어린 능력자들이 재단의 새로운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또한 대단히 뻣뻣한 성격에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 공사가 확실하다는 평도 있었지. 마틴은 검지로 입술을 쓸며 웃었다. 생긴값을 하는 사람이네.
그 덕에 그에게 호의적인 인물이 많았지만, 사람에게 미움받기 쉬운 성격이라고 마틴은 생각했다. 실제로 남자를 납치해달라고 한 것은 남자와 같은 소속 사람이었다. 이 재단에 있기에 그는 너무 위험하다나 뭐라나. 흥미도 없는 말을 줄줄 늘어놓는 것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마틴은 서류 속 남자의 사진을 보고 죽기에는 조금 아까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고, 남자의 외모를 이유로 의뢰를 거절하기에는 보수가 너무나도 짭짤했다. 대신 마틴은 납치 하기 전에 그 외모를 실컷 맛보고 잡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잡아가기만 하면 되는 의뢰였으니까.
그게 마틴 챌피가 그랑플람의 젊은 스카우터 티엔 정의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있는 이유였다. 남자가 자주 가는 바에 앉아서 남자를 꼬시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마틴은 남자의 손목을 슬쩍 쓸었다. 아마도 이번 의뢰도 무탈하게 끝날 것 같은 예감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 했다. 그렇게 남자의 시선을 끌어서, 그의 머릿속에 침입해 최면을 걸려는 순간,
이게, 큿, 무슨짓이지?
남자에게 손목을 잡혔다. 마틴은 당황했다.
네, 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마틴은 남자의 손을 빼려고 노력했으나… 젠장, 더럽게 힘이 좋았다.
무슨 말 하시는건지 모르겠군요. 이거 놔주세요. 불쾌하군요.
마틴은 애써 덤덤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잡힌 팔을 휘둘러 남자의 손을 떨쳐냈다. 남자는 여전히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좋은 만남이 될 줄 알았는데…
다음에 뵐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남기고 마틴은 자리를 떴다. 뒷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내리꽂히는 듯 했으나, 마틴은 그를 무시했다. 재수가 없으려니. 손목을 내려다보니 심지어 멍까지 들었다. 마틴은 의뢰를 당장 돌려보내야겠다고 이를 갈며 바를 나섰다.
그 후로 며칠간 마틴은 집에 틀어박혀 벅벅 이를 갈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왜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거냐고 클레임을 걸러 찾아온 의뢰자에게는, 간단히 최면을 먹이고 기억을 지워서 의뢰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없었던 일이 되는건 아니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정티엔 그 남자도 기억하고 있을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마틴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다. 젠장! 마틴은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애꿎은 베개를 두들겼다. 아니, 왜 능력이 안통해? 무슨 그런 사람이 다있어?
분노가 속에서 드글드글 끓었다. 헌터로 살아온지 6년. 지금까지 이어왔던 의뢰 달성률 100%도, 그에 따른 자부심도 티엔 정, 그 남자 한명때문에 우르르 쾅쾅 무너졌다. 마틴은 의뢰때문에 모아두었던 티엔 정의 자료를 갈기갈기 찢어 속에 들어찬 분노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실패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능력자가 아닌 이상 되돌릴 수 있는것도 아니었고….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너져버린 자존심도 중요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실패한 의뢰의 뒷처리였다. 헌터 마틴 챌피의 일처리방식은, 그 누구도 진짜 마틴 챌피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점을 기반으로 삼았다. 의뢰는 오로지 우편으로, 접선이 필요한 경우는 세뇌를 시킨 타인을 대리로 내세워서. 그리고 의뢰가 성공한 뒤에는 의뢰인에게서도, 의뢰대상에게서도 자신의 존재만을 깔끔히 지워냈다. 그 덕에 마틴은 한 치의 위험도 없이 장기간 이 일을 해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리딩조차 안됐는데 기억 지우는건 정말 무리겠지.
티엔 정의 기억 속에 자신의 얼굴이 남아있다는게 문제였다. 물론 만전을 기해서 그에게는 가명을 대긴 했지만…. 마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래. 뭐 그거 하나로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 게다가 언제 또 만나기나 하겠어?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자신이 의뢰때문에 그가 자주 드나드는 술집근처에서 죽쳐서 그렇지, 실상 그와 자신은 행동반경이 1cm도 겹치지 않았다. 그럼그럼. 괜찮아요, 마틴 챌피. 마틴은 애써 불안감을 달래며 오늘 아침 새로 도착한 편지를 뜯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에는 새 의뢰만큼 좋은게 없었다. 마틴은 편지와 동봉된 의뢰대상의 기본정보를 훑으며 웃었다.
그리고, 짜잔.
…어디, 무슨 생각하는지 맞춰볼까요?
서류 속 새 의뢰대상은 저, 마틴 챌피의 손 아래에 있었다. 무릎을 꿇고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머릿속을 제 좋을대로 휘저으면서 마틴은 웃었다. 새로운 의뢰는 순조롭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다. 아주 완벽했다. 이제 머릿속에서 제 존재를 지우고, 의뢰인이 지정한 장소로 제발로 걸어들어가도록 강한 암시를 걸면 모든것이 아름답게 끝날 것 이었다. 물론 그와중에 상처받아 슬픈 가엾은 마틴 챌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남자가 네발로 세바퀴를 돌고 멍멍 두번 짖는 일이 일어나준다면 더할나위 없고.
마틴은 남자의 뇌와 신경을 요리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몇년을, 수십번을 해왔지만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고 최면을 걸고 그 일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게 처리하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특히 의뢰인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무런 문제 없는' 의뢰대상을 원할경우에는 더더욱.
넘쳐흐르는 생각의 바다 속에서 마틴은 제가 원하는 기억의 조각들을 끄집어내었다. 이제 그것들을 지워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지우개로 깔끔히. 남자는 자신이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영원히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었다.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금발이었는지, 흑발이었는지 혹은 탐스러운 붉은머리였는지. 눈은 무슨색이었는지…. 마틴은 세심하게 자신의 모습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머리통을, 머리카락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지우고 있었다가,
…지금 뭐하는거지?
윽.
읏,
갑작스럽게 현실로 불러들이는 목소리에 남자와 마틴이 동시에 신음을 내뱉었다. 마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간신히 남자에 대한 통제권은 잃지 않았다) 뒤로 돌았다. 그리고 간신히 목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다시 안으로 우겨넣는데 성공했다. 미친. 티엔 정이었다.
마틴은 어색함에 몸이 뒤틀릴거 같은 느낌을 꾹 눌러 참았다. 제 옆에서 볼을 뚫어버릴 것 같이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 필요없고 집에 가고 싶은데 할 말 있으면 빨리 좀 했으면 좋겠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상처받아 연약한 멘탈은 먼저 말걸기를 거부했기에 마틴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왜 지금 이 남자와 옆에 있어야 하는지 자신의 과오를 되짚었다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며 자기합리화를 시도했다.
그래.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가 제 어깨를 붙들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는데, 무거운것이라곤 가득찬 장바구니 이외에 들어본 적 없는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단련된 남자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제 손 아래에서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곧 시체로 변할, 거품을 물고 있는 의뢰대상이 있었다. 마틴은 죽던 말던 때려치고 격렬하게 반항해서 이 자리를 벗어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순간 떠오르는 '의뢰 2연속 실패'라는 글자에 이를 악물고 남자와 타협했다.
이 일만 마무리하면 남자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나서야, 마틴은 의뢰대상의 뇌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하던대로 조작을 끝내자마자 남자에게 이끌려서 한밤중의 공원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
최면계열의 능력인가?
사실은 마인드 리딩이 주고, 최면은 그에따른 부속이었으나 딱히 정정할 의리도 없었기에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마음이 곱지 않으니 말도 곱지않게 나갔다. 그러나 꽤 가시돋힌 말투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별로 기분이 상한것 같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예.
그랑플람에 들어오지 않겠나?
마틴은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싫어요.
왜지? 당신 능력이라면 충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것이다. 보아하니 어디도 소속이 안되어있는 듯 한데, 그랑플람이 당신에게―
남자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마틴은 손을 들어 남자의 말을 막았다.
싫습니다.
용건은 그게 다인가요? 마틴의 물음에 남자가 긍정했다. 마틴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엔 정말로 뵐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마틴은 뒤도 안돌아보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남의 영업을 방해해가며 붙들었던것과는 달리 남자는 더이상 마틴을 붙잡지 않았다.
네, 누구세…
마틴은 문앞에서 신문을 들고 서있는 티엔 정을 보았다. 음, 꿈인가? 마틴은 졸린 눈을 깜박이고는,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닫았다. 닫으려고 했다. 티엔이 재빠르게 구둣발을 문틈 사이로 끼워넣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것이었다. 마틴은 인상을 찌푸렸다. 잠이 확 깼다.
여긴 어떻게…. 아, 됐어요. 신문 안 삽니다. 돌아가시죠.
당신 집 앞에 있던 신문이다만.
가지세요. 그리고 돌아가세요.
단호하군. 이야기나 좀 들어보고 말하지 그래.
티엔은 들어오라고 말하지 않으면 발을 비켜주지 않을 태세로 말했다. 마틴은 그냥 저 발을 확 문틈에 넣고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무슨 힘이 발까지 센지 마틴이 문을 있는 힘껏 밀어도 밀리지가 않았다. 마틴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딱히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좋아요. 단, 오분이에요. 성큼성큼 서슴없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넓은 등짝을 보면서 마틴은 맨처음 티엔을 의뢰했던 의뢰자를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찬장안에는 홍차도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우유도 있었지만 티엔에게 내줄 것은 물 한방울도 없었으므로 마틴은 그냥 의자에 마주앉아 팔짱을 꼈다. 무슨이야기를 하든 반대하겠다는 제스쳐였다. 여유롭게 집안을 한번 둘러본 티엔은 구석에 말아 던져놓은 옷가지며 먹다남은 시리얼봉지 등등에 시선을 주고는(마틴은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표정을 다시 바로했다.
빨리 말하세요. 저 바쁜 사람이니까요.
바쁘게 낮잠을 이어자야했고, 바쁘게 3시쯤 일어나 어제 그저께 사둔 파이가 아직까지 멀쩡하다면 먹어치워야했으며, 바쁘게 소파에 늘어져 오늘자 신문을 봐야했다. 마틴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눈짓했다. 티엔이 그제서야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어제 돌아가서 그랑플람에 들어오면 받을 수 있는 보수표를 작성해왔는데…
나가요.
마틴은 다시한번 티엔 정을 의뢰한 의뢰자를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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