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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샆

티엔마틴 / 동인활동하는 티마au




마틴은 바싹 마른 입안을 달래기 위해 음료수를 들이켰다. 그렇지만 그저 임시방편일뿐, 뻘쭘함의 근원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마틴은 한숨을 쉬며 옆부스에서 책을 팔고 있는 사람을 흘끗 훔쳐보았다. 제법 큰 체격의 검은 머리 남자가 돈을 받고 앙증맞은 분홍색 표지의 책을 건네는 것을 본 마틴은, 제 얼굴을 감싸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미친, 하필 하늘님이랑 옆부스가 될건 또 뭐야…. 당장이라도 부스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아직 예약분을 찾아가지 않은 분들도 있었기에 마틴은 얌전히 부스에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글…제발 빨리 부스 돌고 와요…. 마틴은 밀려오는 어색함과 민망함에 몸부림치며, 속으로 다른 존잘님들의 부스에 있을 이글을 간절히 불렀다.

마틴이 이렇게 탈출욕구에 몸서리치는 이유는 일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도 어째서인지 '하늘님'과 마틴은 같은 장르를 파고 있었다. 단, 리버스로. 사실 장난삼아 신이시여, 저 리버스를 멸하소서! 하고 자주 놀기는 했으나, 자신의 커플링을 덕질하느라 리버스에 별 신경을 안쓰고 있었던 마틴이었다. 아. 그냥 적진의 명장중에 저런 사람이 있구나. 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인상뿐.

그러나 수욕정이풍부지라고, 갑작스레 장르에 혜성같이 나타난 한 사람으로 인해 둘의 관계는 삐걱거리다 못해 아주 파탄이 났다. 리버시블 분자로 위장해 AB와 BA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서로 이간질을 하고, 있지도 않은 험담을 만들어 낸 병크러로 인해 마틴과 티엔은 트위터에서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그 병크러가 사실 AB도 BA도 아닌 CD라는 상관조차 없는 커플링을 파고 있는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며칠 간 이어진 공방에 둘의 정신은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거한 현타에 마틴은 모든 활동을 접었다. 그러나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 그랬던가. 5개월 전 심심해서 이글이 영업한 작품을 보던 마틴은 거하게 덕통사고를 당했고 그날로 정주행을 마쳤다. 트위터를 통해 한참을 앓이하던 마틴은 마침 주최되는 장르 온리전을 발견했고, 끓어오르는 덕심에 취해 패기롭게 행사 참가신청을 넣었다가….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또 장르가 겹칠건 뭐래?! 심지어 이번엔 커플링마저?? 마틴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려다가 예약본을 찾으러 온 손님을 맞이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웃으며 책을 건넨 마틴은 그 손님이 바로 옆부스에 가서 예의 핑크색 책마저 받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신경쓰인다. 무지 신경쓰인다. 무슨 내용인지 보고싶다. 마틴은 새까만 제 책과는 정반대인 소녀소녀한 핑크색 표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리버스면 아예 신경을 끄기라도 하지, 왜 같은 커플링이어서…. 그렇지만 차마 한권 달라고 할 용기는 없었기에 마틴은 눈물을 삼키며 미련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마틴을 구제해준 것이.

 …이글, 그거 혹시 하늘님 신간이예요??
 엉. 그런데?

이글이 들고온 한무더기의 신간 속에서 눈에 익은 분홍색 책을 발견한 마틴이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나 이거 읽어도 돼요?
 되는데…너 원고 안해도 되냐?

쿠션을 베고 엎드려 신간을 읽고 있던 이글이 턱짓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마틴은 책상 위에 펼쳐진 공책을 바라봤다가, 곧 이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괜찮아요. 이거 읽고 하죠, 뭐. 아직 마감 기간 조금 남았고…. 콘티도 일단은 거의 다 짜놓긴 했고…. 대충 스캔하고… 선따고….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듣고 이글이 코웃음을 쳤다. 야. 나중에 마감때 돼서 도와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리지 마라. 마틴은 말없이 손가락 하나로도 표현할수 있는 간단하고 보편적인 욕설을 선보여주었다. 어차피 말은 그렇게 해도 울고불고 매달리며 치킨 두마리정도를 시키면 도와줄 사람이었다.

막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장을 펴려는데, 이글이 막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너 근데 하늘님이랑 완전 취향 다르지않았냐?

지금껏 같은 장르 판 주제에 전부 다 리버스라는 점에서부터 너랑은…. 이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기에 마틴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하늘님의 연성을 보고싶었던 이유가 불순한 동기였기에 말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가끔 탐라 너머로 언뜻 보이는 하늘님의 연성은 제 연성과는 판이하게도 달랐다. 어둡고 질척하고 음침하고 등장인물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무척 자주 밀어넣는 마틴과는 달리 얼핏봐도 핑크빛 솜사탕 같은 그런 연성들을 하는 사람이었다. 미친듯한 리트윗수에 얼마나 대단하길래 싶어 한번쯤은 보고싶었으나 그동안 모조리 같은 장르를 팠으면서도 모조리 리버스를 잡는 그와 저의 취향에 절규하길 수 개월. 대체 왜 자신은 리버시블이 아닌가, 왜 리버스 글자만 봐도 소름이 돋는가 눈물로 지새운 밤이 며칠이던가. 드디어! 하늘님의 연성이 어떤지 눈으로 볼 수 있어! 씨발!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연성이시길래 AB를 파다니 답이 없다는 말을 하는지 두고보자!! 지가파는 BA는 얼마나 잘났다고!!! 마틴은 전투적으로 눈빛을 불태우며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이럴 줄 알았다. 

마틴은 소리없이 절규하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 책이 구겨지지 않게 한쪽 팔을 들어올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미친! 이럴 줄 알았어! 커플링이 맞으니 이젠 캐해석이야! 마틴은 쿠션에 머리를 쾅쾅 박으며 오열했다. 아이씨, 이 새끼 미쳤나! 이글이 질겁하며 마틴 근처에 있던 책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이글이 뭐라 욕하는 소리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마틴은 명확히 갈리는 취향에 슬퍼했다. 더욱 슬픈 것은 그와중에 책이 빌어먹게도 재밌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정반대의 취향에,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절대 이해 못할 캐해석까지 포함해서 더럽게 재밌었다. 

마틴은 돋아나는 닭살을 꾹 참고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머릿속에서 당장 읽기를 그만두라고 명령하는 의식과 어서 다음장을 넘겨 결말을 알게 해달라고 애걸하는 의식이 피터지게 싸웠다. 그리고 승리한 것은 후자였다. 마틴은 나오지도 않는 피 대신 공기를 한 움큼 토하면서도 끝까지 책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마틴은 온 몸을 감싸는 솜사탕 같은 몽글몽글한 기분에 몸서리치며 웃었다. 방금전까지 미친놈처럼 자기학대를 하더니 이제는 실실 웃기시작하는 마틴을 보고 이글이 기겁하며 1m 뒤로 떨어졌다. 

 야, 돼지야. 진짜 미쳤냐?
 닥쳐요. 

마틴은 욕을 하면서도 웃었다. 

 미친, 진짜 돌았나보네!

이글이 한걸음 뒤로 더 물러났다. 이글에게 욕을 들어먹으면서도 마틴은 여전히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흐윽.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마틴의 입꼬리는 위를 향했다. 아…콘티 마저 짜야하는데…. 마틴은 가볍게 양 뺨을 두드렸다. 이런 기분으로는 콘티고 뭐고 없었다. 이런… 만개한 꽃밭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달콤한 간식을 맛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는 도저히 콘티를 쓸 수 없었다. 이런 기분으로는 등장인물들을 절망과 좌절과 나락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솜사탕과 생크림과 홍차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을 것만 같았다. 

마틴은 핸드폰으로 도서관에 있을 제 친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극약처방이 필요했다.

[데샹 빨리 지금 제 기분 좀 좆같이 만들어줘봐요.]

답장은 금방 왔다.

[뭐?]

별로 쓸만한 답은 아니었지만. 마틴은 의자에 앉아 자꾸만 들떠오르다 못해 성층권 위로 돌파하려는 기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손을 움직였다.

[콘티 마무리 지어야하는데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빨리 제 기분 좀 망쳐달라구요.]

이번에도 답은 빨리왔고,

[ㅗ]

별로 쓸만하지 못했다. 젠장. 평소라면 더럽게 기분나빠야 할 데샹의 욕도 소용없었다. 남들과 같은 욕을 해도 남들보다 배는 기분을 더럽게 만들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 까미유 데샹마저도 제 기분을 망치지 못하다니. 무서운 존잘…. 취향마저도 갈아버리는 존잘…. 마틴은 또다시 분홍색 표지로 향하려는 손을 겨우 거둬 컴퓨터를 켰다. 이젠 그 방법 밖엔 없었다. 마틴은 숨겨둔 폴더 속에서 한무더기의 워드 파일을 찾아내 열었다. 제가 마감하기 전, 제 원고를 보고 식자 하나 선 하나 전부 해부하듯 신랄하게 비판을 늘어놓아주었던 까미유 데샹의 피드백 무더기였다. 마틴은 심호흡을 하고 첫번째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5분 뒤, 머리를 쾅쾅 박다가 실실 웃더니 이제는 울면서 자신은 불연소 쓰레기라고 외치며 좌절하는 마틴 챌피를 보며 이글 홀든은 심각하게 구급차를 불러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 시각 '하늘님'께서는 뭘 하고 계셨냐면…

 그만 놀고 네 집에 돌아가라.

다음 책을 위해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그리던 중, 한 손에 전리품인 동인지들을 잔뜩 들고 갑작스레 쳐들어와 냉장고 안의 군것질거리를 약탈한 뒤 뻔뻔하게 제 침대를 차지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 사촌동생을 집에서 쫓아내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계셨다. 하랑은 침대 옆에 가져다 놓은 티슈를 뽑아 들고 코를 풀며 예의 '하늘님', 티엔 정을 올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 거 알아서…킁, 시간 되면 돌아간다니까, 아니면 자고가도 되잖아. 

형 어차피 놀러올 애인도 없으니 괜찮잖아? 그 말에 티엔은 하랑을 걷어차 침대에서 떨어트리려다가 멈춰섰다. 티엔이 다리를 들어올린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하랑은 와야 할 아픔이 오지 않자 슬며시 눈을 떴다. 티엔이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뭐야, 이양반 왜이래? 갑자기 눈길을 피하더니 손에 들린 책을 보고, 또 다시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하는 티엔을 보고 하랑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씨…뭐야. 왜 그래?
 그.

재밌나? 하랑의 얼굴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엔은 하랑의 손에 들린 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뜻 그모습에서 티엔이랑은 거리가 백만광년은 먼 '수줍음'이라는 감정이 엿보인거같아 하랑은 소름이 돋았다. 착각이겠지? 하랑이 대답이 없자 티엔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거 '침묵의 시간'님 저번 신작아닌가?
 어, 어.
 재밌냐고.
 어? 재밌지?

하랑의 대답에 티엔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 했다. 망설인다고? 진짜 이 형 뭐 잘못먹었나???? 미친 3D도 캐붕나는거였어? 하랑은 실생활에서 맞부딪힌 캐릭터 붕괴의 실례에 멘탈이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그….

 내가 좀 봐도 되겠나?
 응?
 이번에 침묵의 시간님께서 나랑 같은 커플링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와 그는 사이가 좋지 않지. 그래서…. 답지않게 말끝을 흐리는 티엔을 보고 하랑은 뒷말을 유추했다. 졸라게 궁금한데 못샀다는 말이군. 하랑은 들려있던 책을 티엔에게 건넸다. 어차피 내용은 다 읽었고 후기만 남겨뒀던 차였다. 그리고 지금은 얌전히 책을 넘기고 이 맛있는 간식과 따뜻한 이불이 제공되는 안락한 자리에 눌러붙는 것이 이득이었다. 

 봐. 어차피 나 다봤어.

하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책을 보고 질질 짜느라 모자란 수분을 섭취하기 위해 콜라를 계속 마셨더니 화장실이 급했다. 나 화장실 좀. 하랑은 책을 펼쳐드는 티엔을 뒤로 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을때야 한가지 사실을 생각해냈다. 티엔의 취향과 시커먼 표지의 책은 일억광년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절절히 울리다 못해 멘탈을 조지는데 일가견이 있는 '침묵의 시간', 일명 침시님의 책은 제 사촌형의 핑크빛 솜사탕같은 감성과는 전혀 맞지 않을것 같았다. 하랑은 티엔이 즐겨 그리던 파스텔톤의 화사한 그림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사사건건 적진의 명장으로 맞부딪히던 두사람의 전적 또한 떠올렸다. 아, 씨. 에이, 그래도 볼 가치도 없다며 책 집어던지진 않았겠지. 하랑은 답이 없군, 하며 차가운 얼굴로 책으로 캠프파이어를 하는 티엔을 상상했다. 제법 그럴듯 했다. 

아이씨. 책 망가지면 안되는데. 하랑은 냉장고에서 새 음료수를 꺼내고는 재빨리 방으로 향했다. 이미 하랑의 머릿속에서 티엔은 신에게 저 캐해석을 멸하라며 책을 불태워 고구마를 굽고 있었다. 하랑은 방문을 벌컥 열었다.

 형!

그리고 그곳에서 크리넥스 한통을 작살내며 '침시님'의 신간을 읽고 있는 사촌형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