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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샆

티엔마틴 / 진단메이커1

티엔마틴의 앵스트 연성 소재는 낡은 벽장, 떠돌이, 내가 보고있는게 당신인가요. 입니다

https://kr.shindanmaker.com/440719

사망소재 주의




1

마틴 챌피는 티엔 정을 사랑한다.

얄궂게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티엔 정이 죽는 순간이었다. 다부지게 근육이 잡혀있는 등이 무너지는 것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마틴은 쓰러지는 남자의 몸을 겨우 받아낼 수 있었다. 늘 깨끗한 하얀 도복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마틴은 떨리는 손으로 남자를 흔들었다. 티엔, 티엔? 남자는 답이 없었다. 티엔?…제발, 티엔…. 마틴은 그 곳이 전장 한복판이라는 것도 잊고 남자를 끌어안았다. 제발요, 죽지말아요…. 마틴은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나 남자는, 숨을 쉬지 않았다.



2

그 뒤의 일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마틴은 다친 몸을 이끌고 서서 이어지는 추모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아까운 인재의 죽음을 애도하러 찾아온 빈객들은 국화꽃과 함께 각자 애도의 말을 건넸다. '대신 감싸고 죽었다면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야할텐데, 지금의 재단에는….' '전투면에서는 티엔 정이 훨씬 뛰어난데 앞으로 전투 양상이 어떻게 될지… 거, 참.' '애초에 비전투요원이 왜 그 전장에 있었던거야?' '그만큼 재단이 일손부족이라는 건가.' 마틴은 범람하는 소요의 바다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밀려오는 목소리들을 막아줄 이는 관짝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쫓기듯 도망친 마틴은 어두운 방, 낡은 벽장 앞에 섰다. 남자가 너무나도 보고싶었다. 



3

처음으로 도착한 곳의 재단에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의 흔적을 더듬고 물어 찾아보니, 남자는 아주 오래전 죽었다고 했다. 열 넷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마틴은 낡은 의자위에 앉아 어린 남자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마나 착한 아이였고 또 얼마나 열심히 수련에 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절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촉촉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던 남자의 어머니를 향해 마틴은 서툰 중국어로 애도의 말을 건넸다. 두번째 세계에 도착했을 때에는 막 남자의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제자 둘은 죽은 남자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마틴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양 팔의 기운이 결국 온 몸을 잠식해 괴로워하며 죽었다고 했다. 마틴은 남자의 죽은 눈꺼풀 위를 가로지르는 새까맣고 하얀 흔적들을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세번째 세계에서는…. 마틴은 그 어느곳에서도 남자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다. 남자가 있어야할 자리를 대신한 이의 자료에 첨부된 양팔이 매끄럽게 하얀 동양 여인의 사진을 보고, 마틴은 주저없이 낡은 벽장의 문을 열었다.



4

네번째도, 다섯번째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마틴이 낡은 벽장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시점의 평행세계들 뿐이었고, 그 과거로도 그 미래로도 어느곳에도 갈 수 없어서 마틴은 수많은 세계들의,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를 포함한 무수한 남자들을 구하려는 시도 조차 할 수 없었다. 열번째 세계까지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이 존재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스무번, 서른번째의 세계에 발을 내딛으며 마틴은 그가 할 수 있는것은 그저 그 세계의 티엔 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아보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여행이 남자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끝없이 계속되는 도피일 뿐이라는 것도. 남자가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에, 마틴 챌피가 할 수 있는것은 벽장 문을 열고 다음 세계로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5

몇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세계는 삭막한 전장으로 마틴을 안내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노을빛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마틴은 남자를 보았다. 또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까지도. 죽어가는 인형들과, 혹은 그와 딱히 다를 것이 없는 죽은 시체들을 스쳐지나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티엔 정! 마틴은 다급히 남자의 이름을 외쳤고, 남자가 고개를 든 순간 마틴은 그의 품으로 날아드는 것에 성공했다. 살을 뚫는 아픔이 덮쳐왔지만 마틴은 웃었다. 제 팔 아래서 남자가 숨을 쉬고 있었다. 비록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고 전장을 굴러 먼지투성이었지만 온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열기와 환희가 치밀어올랐다. 이제서야. 드디어. 시야가 흐릿하게 물들었다. 마틴은 몇번이고 그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려 애를 썼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틴은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 

내가 보고 있는게 당신인가요?



6

금방이라도 사그러 들 것 같은 목소리였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한 전장 속에 묻혀버릴 것 같은 작은 목소리였지만 티엔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이름 모를 청년의 물음에 티엔은 어쩐지 그래야할 것만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대답에 가슴께에 안도의 숨결이 와닿았다. 그래요, 그렇군요…. 청년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티엔의 옷깃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경계를 해야할 것이 분명한 낯선 이임에도 불구하고 티엔은 오히려 청년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청년이 토해내는 핏덩이인지 그가 흘리는 눈물인지 모를것으로 티엔의 옷이 축축히 젖었다. 있잖아요, 티엔…. 티엔은 숨소리와 섞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청년의 등을 도닥였다. 나, 당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청년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남겨져있던 힘을 다해 입술을 달싹였다.



7




8

…그래. 티엔은 식어가기 시작한 청년을 껴안고 속삭였다. 그래. 물기 어린 대답에 청년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