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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쿠농

빙녹 / 파멸

빙녹. 사랑스러움과 열등감과 애정과 증오가 한데 뒤섞인 히무로와 그게 어떤 감정이든 자신을 향한 것이면 기쁘게 받아들이는 미도리마. 글은 고치고 싶은데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다.  






또다. 또 저지르고 말았다. 정신이 들자마자 히무로는 망연자실하게 생각했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달아오르는 하얀 피부가 시퍼렇고 까만 멍자국으로 가득했다. 입가도 찢어지고 눈가는 손톱에 긁혀 생채기까지 나있었다. 히무로는 일단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을 뻗었다. 새까만 멍 위를, 스무번은 더 망설이다 손가락으로 살짝 매만지자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이 얽어져왔다. 멍으로 가득한 몸과 달리 아무런 상처하나 없는 깨끗한 손이었다. 그 손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불안함과 두려움이 무너지고 갇혀있던 미안함이 물결처럼 터져나왔다.

 

미안,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물감으로 얼룩진 캔버스같은 몸에서 유일하게 깨끗하고 새하얀 손을 붙잡고, 히무로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고장난 카세트처럼, 그 목소리는 뜨문뜨문 끊기기도 하다가, 늘어지기도 하다가 또 치직대는 듯한 흐느낌 소리를 동반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 미안해, 미도리마군… 그 목소리가 고장난 카세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카세트와는 달리 선명하게 생생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일터였다. 미도리마는 제 손을 붙잡고 거듭 사죄하는 히무로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이 고장난 카세트를 끄지 못하고 반복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생생하게 흘러넘치는 감정때문 일거라고 미도리마는 생각했다. 제 몸위로 쏟아지는 오롯이 저만을 향한 진실되고 진한 감정들.

 

미도리마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입술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쇠맛이 났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목이 쉬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였다. 축 처진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괜찮다는 것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히무로는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꽉 주려다가 화들짝 놀라 힘을 뺐다. 안절부절 못하는 히무로의 모습을 보며 미도리마는 눈을 내리깔고 작게 웃었다. 히무로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히무로는 고개를 들었고, 그리고 어떠한 감정으로 가득찬 눈과 마주쳤다.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주문처럼 날아들었다. 전 정말로 괜찮아요. 마음속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듯한 마법같은 주문.


그게 바로 어제 같은데.


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스위치인 것 처럼, 새까맣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고 마치 최면에서 깬 것 처럼 현실에 돌아왔다. 또? 히무로는 아직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은듯한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이상했다. 어디선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히무로는 천천히 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새하얀 피부 위에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평소처럼. 그리고… 


 아…


새하얗고 긴 손가락이 어딘가 어긋난 것 처럼 비틀려 있었다. 히무로는 멍청하게, 탄식을 내뱉은 채로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저 뒤틀린 손가락이 그려내던 믿을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포물선이 떠올랐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기적같은 공의 궤적. 


그대로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넋이 나간것처럼 제 위에 앉아있는 히무로를 보며 미도리마가 부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눈도 부었는지 시야가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부어올라 뜨듯해지는 손가락 위로 뚝,뚝 시원한 눈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아, 히무로씨. 우는건가. 미도리마는 부러지지 않은 왼손을 들어 더듬더듬 히무로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볼을 타고 떨어져내리는 눈물을 엄지로 닦아내며 미도리마는 또, 평소와 같은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가 흘러나오리라 생각했다. 


 …우리…헤어지자.


눈물을 닦던 손길이 잠깐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괜찮다고? 이렇게, 일주일이 멀다하고 널 잡아패는데 그런데 괜찮다고?
 괜찮아요. 당신이니까요.

 아무 이유도 없이, 주먹으로 때리고 걷어차고, 정신이 들면 사과하고, 지긋지긋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제발…

신타로. 제발… 부러진 손가락을 소중하게 감싸며 히무로가 잦아들어가는 소리로 속삭였다. 이대로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걸어들어가는 것은 미친짓이었다. 제발… 헤어지자…제발…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히무로의 목소리를 듣던 미도리가 눈물을 훔치던 손으로 히무로의 볼을 감싸쥐며 물었다.

 

 이젠, 제가 싫어진 것입니까?
 아니, 아직도 네가 좋아. 네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제발, 응? 제발 헤어지자. 말 듣자. 응?


눈물로 가득찬 시야사이에서, 히무로는 어떠한 감정으로 가득찬 녹색 눈을 보았다. 그리고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완연한 입술이 들썩이고, 히무로는 제가 무슨 말을 들을 것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괜찮아요.
 제발, 내 말 좀 들어…
 괜찮습니다.
 지금까진 괜찮았다 쳐, 한번도 부러트리지 않은, 아니 부러트리지 못한 네…손가락을 부러트렸어. 
 바로 정신을 차렸잖습니까. 그러니 괜찮아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이번에 정신차렸다고 해서 다음에도 그러라는 보장이 없잖아. 다음번에는? 


부러트린게 손가락이 아니라 다리라면? 혹은 네 목이었다면? 정신차렸는데…만약…만약 네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히무로의 눈을 바라보며 미도리마는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 파멸로 걸어들어가는 길이더라도, 그게 미친짓이더라도 둘이라면 저는 즐겁게 들어갈 수 있었다.


 괜찮아요. 타츠야씨. 괜찮아요.
 You are fucking crazy…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그러니까, 어떠한 감정이라도 좋으니까 내게 오롯하게 부어주세요.


나는 괜찮으니까요.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 처럼 반복되어지는 말을 들으며 히무로는 웃음을 터트렸다. 알수도, 이해할수도 없는 감정으로 기이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에서 언듯 둘이 함께 걸어들어갈 파멸이 보이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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